diletant의 제.멋.대.로 쓰는 이야기

졸업한 이듬해에 전자계산학과 10주년 기념집을 받았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20주년이란다. 그 때는 졸업생 명단 뒤쪽에 실렸었는데, 이젠 선배들보다 후배들이 훨씬 많아져 버렸다. 그래서일까. 대학 시절의 추억을 써 달라는 말에 모니터를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었지만 딱히 떠오르는 게 없다. 추억이 없는 건지, 아니면 시간이 흘러서 그새 다 잊혀진 건지...

예나 지금이나 내가 이대를 졸업했다고 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이렇게 얘기한다. “이대생 같지 않으시네요.” 더불어 전산과(지금은 컴퓨터학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를 졸업했다고 하면 십중팔구 하는 말, “그럼 컴퓨터 잘 하시겠네요?”

이대생 같지 않은 모습으로, 컴퓨터를 ‘잘 하지도’ 못하는 채로 4년을 보냈던 내 대학 시절이 담긴 장소 세 곳.

하나, 전산실습실

이렇게 쓰면 아마 나를 잘 아는 친구들은 이렇게 말할 거다. “너, 실습실에 오긴 했었냐?”

사실 이 자리를 빌어 고백하자면 전산과에서 4년 내내, 난 즐거운 마음으로 실습실에 갔던 적이 별로 없었다. 그러니 추억의 장소라기보다는 떠올리면 마음이 무거워지는 장소이긴 하다.

실습실에 얽힌 잊지 못할 기억은 뭐니뭐니해도 2학년 때였던 87년 봄이 아닐까. 2학년 올라와서 한꺼번에 코볼, 파스칼, 어셈블리 언어 세 종류의 실습 숙제를 받아들고 동동거렸는데 알고 보니 그런 사정은 우리 학년만이 아니었다던가. 새벽 6시에 집을 나와서 종과 실습실에 올라와 보니 아직 문도 안 연 실습실 앞 어두컴컴한 복도에 주루룩 줄 서서 기다리던 가방들이 지금도 눈 앞에 선하다.

게다가 메인 컴퓨터의 사정이 유달리 안 좋아서 터미널 앞에 앉아서 컴파일 한번 시키려면 한두 시간 정도는 너끈하게 잡아먹고 보니, 정말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그렇게 전쟁을 치르면서 한 학기를 지내고 난 다음부터는 웬만한 상황이 닥쳐도 “그 때도 지냈는데...” 한 마디로 넘길 수 있게 된 것이 소득이라면 소득이었고.

얼마 전 컴퓨터를 업그레이드하면서 40기가 하드디스크에 258메가 램을 보고는 잠시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서 혼자 웃었는데, 그때 당시 실습실의 ‘악몽’을 기억하고 있는 다른 이들도 아마 이러하지 않을까.

둘, 서클룸

이젠 동방(=동아리방)이란 말에 밀려 더 이상 쓰지 않는 말, 서클룸. 그래도 내게 학생관 406호는 여전히 동방이 아닌 서클룸일 뿐이다.

과에선 뒷전에서 떠도는 학생이었던 대신 서클룸에 다니는 재미로 학교를 다녔다고 하면 여기저기에서 비난의 화살이 날아오겠지만, 아침에 휴웃길을 올라오다가 종종 발길을 옆으로 돌려서 학생관으로 새곤 했으니 날나리 학생이었음은 분명하다.

지금은 그 자리에 새로운 건물(학생문화관)이 들어서서 더 이상 모습이 없게 된 옛날 학생관 건물은 여름이나 겨울이나 항상 자연 냉방이 되는, 그런 건물이었다. 겨울이면 밖에서 직접 석유를 사다가 난로를 피워야 했는데, 서클 주머니나 내 주머니나 별로 여유가 없기는 마찬가지. 덕분에 겨울의 기억은 언제나 시린 손 녹여가며 기타치던 것 뿐이다.

요즘도 가끔 동아리에 들른다. 여름이면 종일 에어컨이 돌아가고, 겨울에는 난방이 되는 그 곳에서 “힘들어요~”, “더워요~”, “추워요~”를 외치는 까마득한 후배들을 보고 있노라면 옛날에 어른들이 기회만 있으면 가난하고 힘들었던 얘기를 하고 또 하던 심정이 조금은 이해가 된다고나 할까.

셋, 도서관

그렇게 설렁설렁 대학 4년이 흐르고 졸업이 얼마 안 남았을 때, 가장 아쉬웠던 것 중의 하나는 더이상 학교 도서관을 드나들 수 없으리라는 거였다.

지금도 기억난다. 처음 입학하고 도서관 서가에 들어갔을 때 숨막히듯 뿌듯했던 그 느낌. 한동안은 읽고픈 책을 골라내지 못하고 서가 사이를 마냥 돌아다니기만 했던 일. 내 키보다도 높이 쌓인 책 사이에 서 있으면 마냥 행복하면서도 그 위압감에 짓눌리는 듯한 그 느낌.

당시 쓰던 도서대출증은 지금 학부에 다니고 있는 후배들에겐 낯설기만 할, 일일이 손으로 서지사항을 쓰고 날짜 도장을 찍어야 하는 3단 접이 종이 카드였다. 도서관에 드나들 때도 입구에서 카드만 보여주면 되었는데, 졸업할 즈음해서 바코드가 붙은 대출증으로 바뀌었던 것 같다. 학생증과 통합되어서 빳빳하게 코팅된, 조금은 낯선 모습으로.

졸업하고 몇년 뒤에 졸업생 출입증을 만들었을 때, 처음으로 도서관에 들어가려고 보니 바코드를 찍어주지 않는 게 아닌가! 어리버리하게 헤매는 날 보고 입구의 직원이 하는 말. “여기 졸업생 아니세요?”, “네... 저... 저기 졸업한 지가 오래 되어서요.”

일일이 바코드를 찍어주는 대신, 정해진 장소에 카드를 놓으면 찍히도록 기기가 설치되어 있다는 사실을 내가 알 리가 있나. 덕분에 앞뒤에 선 학생들의 미심쩍은 눈초리에 민망했던 기억이 있다. 이러다가 어느날 와 보면, 지문인식시스템 같은 걸로 바뀌어서 또 한참 동안을 헤매게 되는 건 아닐까.

끝으로...
추억도 소중하지만, 지금 처해있는 그 시간, 그 곳이 가장 소중하다. 이 글을 보시는 모든 분께 평화로운 하루가 되시기를...

2001/09 컴퓨터학과 20주년 기념집 中 ‘추억 릴레이’>

수십 년만에;;; 책방을 정리하다가 '기념집을 발견한 기념'으로 옮겨 본다.
편집 과정에서 내가 쓴 것과 달라진 문단 나누기만 살짝 고치고, 표현이나 띄어쓰기 같은 것은 그때 그대로 그냥 뒀다. (틀린 부분 고치고 싶어서 손가락이 근질근질하지만. ^^;;)

그나저나 내년이면 벌써 30주년이로군. 으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