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9/12
즐거운 인생
이준익 감독 2007년작
정진영 (기영 역)
김윤석 (성욱 역)
김상호 (혁수 역)
장근석 (현준 역)

한 마디로 하자면 그야말로 '아저씨들을 위한 동화'.

영화는 재미있게 봤다.
정진영은 <왕의 남자>에서 헤벌쭉 웃으며 "놀자~"고 하던 연산군을 좀더 코믹 버전으로 바꾼 듯한 연기를 잘 보여 줬고, <천하장사 마돈나>의 "가드 올리고~"가 아직도 귀에 생생한 김윤석은 덤덤한 표정으로 하루하루를 사는 아저씨 마음 속에도 열정은 살아 있소 소리치는 것 같았고, '내 한 몸 부서져도 자식들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리'표 아빠를 절절하게 연기한 김상호는 이런 아빠 많겠지 싶어서 짠했고.
특히나 TV를 잘 안 보는 내 머릿속에서는 장근석 하면 논스톱밖에 생각이 안 나는지라, 어 얘 제법이네 싶어서 처음엔 깜짝 놀랐다.

장근석 같은 예쁘장한 녀석은 뺀다 쳐도, 길거리 지다가다 흔히 스쳐 지나갈 것처럼 생긴 아저씨 셋을 버무려서 이런 영화를 만들어 내는 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 싶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를 허술하다, 거칠다고 하는 사람들도 꽤 되던데, 내 감성과 흥미에는 딱 들어맞는지 난 보고 있으면 구멍난 부분을 잘 모르겠더라.

음악도 좋았다. 흘러간 옛날 노래도 듣기 좋았고, 극중 밴드 <활화산>이 부르는 '터질 거야'나 '즐거운 인생'도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여전히 여자들과는 화해(? 이해?)하지 못하셨군 싶은 아쉬움이 남는다. 남자들의 힘겨움, 고민, 튀어오름이 마음에 팍팍 와 닿는다면, 그에 비해 여자들(정확하게는 마누라들)의 모습은 참 평면적이랄까.

직장에서 명퇴당하고도 정신 못차리고(남편을 이렇게 생각하는 걸로 그리고 싶어한 게 확 티난다!) 밴드나 하겠다고 돌아다니는 남편에 대한 한심함과 미움과 애정이 그나마 뒤섞여서 엿보이는 기영의 아내는 그래도 나은 편. 관심은 온통 공부 잘 하는 아이들 뒷바라지에만 쏠려 있고, 남편한테 잘 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애들한테 드는 돈 열심히 벌어와~로 요약되는 성욱의 아내. 그리고 아이들만 데리고 캐나다로 조기유학 갔다가 어느 날 갑자기 이혼하자고 나오는 혁수의 아내(처음부터 끝까지 목소리만 등장)는 뭐랄까... 신문이나 뉴스에 곧잘 나오는 모습을 보고 베낀 듯하다.

그녀들에게는 고민이 없을까? 이유는 또 없으려고. 초점을 남자들에게만 맞춰서 그렇다 말하면 뭐 할 말 없지만, 여자에다 엄마고 영화 속에 나오는 것처럼 일상 생활에 헉헉대는 40대 아저씨의 마누라인 나는 아무래도 그녀들에게 시선이 간다. 그리고 이건 아닌데... 하는 껄끄러움이 계속 남는다. <라디오 스타>까지는 다음 작품에선 어떻게 될지 지켜보자 싶었는데, 이제는 그냥 이 감독의 한계려니 생각할 듯.

그래도 남들이 이 영화 어떻드냐 물으면 '한 번 볼 만하다'고 대답은 할 거다. ^^
나 역시 철이 없어서 그런지 '하고 싶은 거 있으면 하고 살아'란 성욱의 말이 너무나 마음에 와 닿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살려고 애쓰고 있으니까.

덧붙여서...
이 영화, 코미디라는데, 보고 나온 아저씨들 표정이 거 참... 우리집 남편네부터 '남의 일 같지 않더라'고 하는 걸 보니, 삶의 고단함이 확 와 닿았나 보다.


CINE de CHEF 이야기
남편네 회사에서 전 직원 대상으로 '문화 모임'을 하면서 팀장급 이상은 부부 동반을 하래서 어쩔 수 없이 쭐래쭐래 따라가게 됐다. 공식적인 부부 동반 모임은 생전 처음인지라, 뭐 입고 가야 하나부터 가서 어떻게 있으면 되나 고민이 많았는데 남편네 왈 "영화 한 편 보러 가는데 뭘 그리 신경 쓰냐"고 해서 그나마 마음을 진정시키고 갔지.

CGV에서 프렌치 레스토랑+고급 영화관 컨셉으로 만든 곳. 가기 전에 약도 보려고 들어갔다가 가격을 보고 말았다. (헉~ @_@) 뭐 내 돈 내고는 갈 생각 안 들겠지만 밤낮 안 가리고 일 시키는 회사에서 주는 선물이겠거니 생각하니 몇 번 더 먹어도 되겠다 싶기도. ^^;

30명이 좌악 이어진 테이블에서 밥 먹으면 참 부담스럽겠다 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건 아니었고 4인용 테이블에 3~4명씩 흩어지는 구조라서 밥은 그냥 편하게 먹었다. 대신 높은 양반들 올 때마다 열심히 인사하느라 바빴다.

무알콜 칵테일-콜드 애피타이저-웜(이 단어 보면 바이러스 생각이 먼저 나서...;) 애피타이저-소르베-메인 디쉬-디저트로 이어지는 코스. TV 요리 프로에서 보는 것처럼 흰 접시에 이것저것 쬐끔씩 담고 뭔뭔 소스로 그림도 그리고 글씨도 쓴 걸 직접 먹어보기도 하는구나 싶었다.

음식은 내 입맛에는 잘 맞았다. 차가워야 할 건 차고, 따뜻해야 할 건 따뜻하고, 간 잘 맞고. 하긴 이 정도 비싼 곳에서는 당연한 얘긴가?;; 마지막에 나온 케잌(딱 손가락 두 개만큼 준다)이랑 커피맛까지 괜찮아서 만족스러웠다.
그치만 양식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남편네는 옆 테이블 딴 아저씨랑 "이런 데 말고 설렁탕집이 딱 좋은데..." 어쩌구 하면서 빵이 제일 맛있단다. 단 디저트는 홀랑 남기고. 불쌍하게스리.

영화관은 30명 들어가는 상영관인데 몇백만 원이라더라... 비행기 좋은 자리에 있는 의자 비슷한 거라고 하더군. 디따시 큰 가죽의자가 둘씩 붙어있는 구조. 담요도 주고 디저트 다 못 먹었으면 옮겨도 준단다. 발받침 근사하고, 뒤로 확 제낄 수도 있어서 앞자리에서도 영화 보는 건 전혀 문제가 없었다. 여기저기에서 "돈이 좋긴 좋구만~" 그러더라. 나 역시 동감.

가기 전엔 좀 부담스럽긴 했지만 덕분에 좋은 체험 했다. ^^


덧글>
나올 때 쬐끄만 쇼핑백을 하나씩 주길래, 난 애들 갖다주라고 케익이라도 한 쪽 들었나 했는데 차에서 풀어보니 이런... 이름은 많이 들어본 댑따 비싼(거라고 소문난) 화장품.

생각해 주는 마음은 정말 고맙긴 한데 이런 거 안 쓰니 참 난감하기 짝이 없네 그려. 내가 날마다 빼먹지 않고 바르는 건 스킨(겨울엔 핸드크림이랑 가끔 수분크림 정도) 밖에 없다구.

그냥 저렴하게 도서상품권이나 몇 장 주셨으면 나 같은 소박한 마누라는 훨씬 기뻤을 텐데. 하긴 다 내 마음 같지는 않을래나?
...아닌 사람이 더 많을 것 같기도 하다.

diletant | 2007/09/14 00:35 | 노는 이야기 - 영상 | 트랙백 | 댓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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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tary 2007/09/15 22:08 x 아 그 말로만 들어본 씨네 드 쉐프에 가셨군요!!부럽습니다. 이준익감독은..이전에 제작자로 활동했을 헤드윅같은,제가 좋아했지만 흥행은 말아먹은 그런 영화들을 수입했던 분이라 좋았어요(;;) 라디오스타도 좋았는데 이번 영화는 못 봤네요. 희윤 2007/09/17 11:15 x 와, 그래도 <즐거운 경험>이었겠군. 무지 긴장하더니, 가서 즐거웠다니... 부럽다 ^^ 요즘 교육부 공무원들 교육연수에서 워크샵 하는데, 그분들 보니 형부 생각도 많이 나고, 우리 나라 아빠들의 현실이 너무 절절히 느껴지고 또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부인이랑 아이들은 어떨까 싶어 마음이 복잡하더라. 그래도 회사에서 이렇게 신경쓰는 마음새는 참 괜찮네... diletant 2007/09/19 01:06 x istary님/ 거기가 가격이 좀 되다 보니까 젊은 분들 사이에서는 이벤트용 장소(예: 프로포즈라든가, 뭐뭐 몇주년이라든가...)로 얘기되곤 한다더군요. 이준익 감독 인터뷰에서도 봤어요. 자기가 영화만 수입하면 망했다고... ^^;; 희윤/ 맞벌이는 맞벌이대로 힘들겠지만, 한쪽에만 돈 벌어오는 힘겨움을 지워준 집은 나름대로 언제나 마음이 무겁다. 이 회사는 마음씀씀이가 괜찮은 편이지? 직원들은 많이 쪼임당하는 것 같지만. ^^; 이름 ::   비밀번호 ::   홈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