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와 앨리스 (花とアリス)
이와이 슌지 감독 2004년작
스즈키 안 (아라이 하나 역)
아오이 유 (아리스가와 데츠코 역)

일본 영화가 우리나라에서 정식으로 개봉되기 전에도 파일로, CD로 많이도 떠돌던 이와이 슌지 감독의 영화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보고 좋아하는 것에는 이상하게도 끌리지 않는 성격대로, 이 사람의 영화도 제목만 많이 들었을 뿐 그 유명한 <러브레터>조차도 보질 않았다.
그러던 내가 <하나와 앨리스>를 보러간 건 두 여자아이의 우정 이야기, 라는 문구를 봤기 때문일 거다.
처음 보는 이와이 슌지 감독의 영화는 무척이나 영상이 아름다웠고, 영화 내내 흐르는 음악이 참 인상적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단짝으로 지내던 두 친구. 한 친구가 짝사랑하던 남자를 좋아하게 된 다른 친구.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설정. 그리고 현실에서도 종종 일어나는 이야기.

사실 그들의 사랑 이야기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내 나이 또래의 어른들도 아니고 풋풋한 나이의 아이들의 어쩔 줄 모르고 두근대는 사랑 이야기는 이미 내가 실감나게 느끼기에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다.
그러므로 통학 전철 안에서 마주치는 남학생을 몰래 뒤쫓아다니고, 그하고의 관계를 어떻게든 만들어내기 위해서 '기억상실증' 이라는 깜찍하고도 어처구니 없는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안간힘을 다하는 하나를 보면서는 그 안타까운 마음을 이해는 할 지언정, 감정이입을 할 수는 없었다.

아리스가와, 친구들에게는 '앨리스(일본 발음으로는 아리스)'라고 불리는 아이. 예쁘고 밝고 장난기 넘치고 적극적인 아이.
그러나 이런 겉모습과는 달리 앨리스가 삶에서 느낄 크나큰 외로움이 전해지는 그 순간부터, 그전까지 예쁜 영화구나 싶어 그저 바라보고 있던 영화 속으로 빨려드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앨리스가 들어선 집은 뒤죽박죽이라고만 말하기가 미안할 정도로 헝크러져 있다. 그 어지러운 속을 지나가는 앨리스를 따라가는 카메라. 집안의 엉망진창인 모습과 깜찍한 인형들로 채워진 앨리스의 방이 그 아이의 고단하고 외로움을 말해주는 듯했다.
그리고 아까 빵집에서 만났던, 앨리스를 옆집 아이라고 했던 그 여자가 앨리스의 엄마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 참을 수가 없어졌다. 애써 저녁을 준비하고 있는 딸에게 밖에서 밥 먹고 들어왔다고 하는 엄마. 혼자 다 먹을 수 없으니 같이 먹어달라고 애원하는 딸. 속에서 뭔가 울컥울컥하는 그 느낌.

따로 사는 아빠와 밖에서 오랫만에 만난 앨리스. 아빠의 말에 사이사이 '징그럽다'고 퉁박을 주면서도 아빠는 기억하지 못하는 옛 기억을 소중하게 더듬어간다. 딸에게 '워 아이 니' 라고 입밖에 내어 말할 줄 아는 아빠. 하지만 마음이라는 건 한 순간의 사랑만으로 다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
아빠와 전철 플랫폼에서 헤어지고 닫힌 문 너머로 멀어지는 아빠를 보는 앨리스는 눈물을 흘리지도, 소리치지도 않았지만, 그 미묘한 표정만으로도 아이의 느낌과 말이 전해져 온다.

'외로운 아이' 라는 설정은 내게는 블랙홀 같다. 영화건 소설이건 그런 설정에 부딪혀서 그 외로운 아이의 심정을 느끼는 순간, 그 작품에 대한 어떤 객관적인 평가도 불가능해진다.


왜 '발레'일까 싶었다. 집에만 틀어박혀있던 하나를 세상으로 끌어내는 계기가 된 것도 발레이고, 오디션에서 언제나 몇 마디 말조차 하기 힘들어하던 앨리스가 처음으로 자신이 가진 것을 마음껏 보여준 것도 발레였다.

발레가 뜻하는 것은 뭘까. 우리가 보통 발레하면 떠올리는 클래식 발레를 생각해 보면 알 것도 같다. 공주와 왕자와 요정이 나오는 이야기에 반짝거리는 토슈즈를 신고 화려한 레이스로 장식된 튜튜를 입고 춤을 춘다. 발레 무용수들의 동작 하나하나는 뼈와 근육을 평소에 쓰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뻗고 트는 것. 그만큼 비일상적인 이야기가 있을까. 각자의 아픔을 지닌 하나와 앨리스가 유일하게 그 아픔을 잊고 파묻혀 있을 수 있던 세계가 발레였던 게 아닐까.

폐쇄적인 도구였던 발레는 끝부분에서 앨리스가 세상으로 나오는 발판이 된다. 하나 역시 발레교실 친구가 찍어서 전시한 발레 사진을 보고 그 속에 나란히 서 있는 자신과 앨리스를 보며 앨리스하고의 일을 다시 한 번 생각한다.



...... 끝마무리를 하려고 이런저런 얘기를 썼더랬는데 어느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아서 지워버렸다. 왜 언제나 글을 쓰면 쓰는 도중에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지 모르게 되고 끝맺음을 못하게 되는 걸까.

여기에는 제대로 마무리를 못했지만 내가 끝마무리를 하려고 썼던 분량은 훨씬훨씬 많으니까, 혹시라도 읽다가 무슨 끝이 이래~ 하시는 분은 그걸로 이해해 주십사 말하고 싶은 생각이 무럭무럭 드는 건 아무래도 오늘 벌어진 모 사태(...)를 보고 느낀 작은 심술이겠지...

diletant | 2004/11/24 20:45 | 노는 이야기 - 영상 | 트랙백 | 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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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댕이 2004/11/25 23:12 x 이와이 슌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학교에서 이리저리 떠돌던 러브레터를 세번이나 봤었습니다. 결국 극장에서도 보고; tv에서도 봤었죠. 이사람은 참 서정적인 장면으로 다가오면서 거기서 멈추지 않고 확실한 이야기 하나를 만들어주는 게 좋습니다. 보통 감독들은 장면에 집착하는 경우일 수록 story를 무시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하나와 앨리스는 아직 안봤는데 다들 평이 좋네요. 기대됩니다.^^ ...그런데, 모 사태는 뭐에요?@.@ diletant 2004/11/26 21:08 x 달댕이님/ 이 영화를 보고 이와이 슌지 감독의 다른 영화도 보고 싶어졌습니다. <하나와 앨리스>도 굉장히 좋았다는 사람부터 <러브레터>만 못하다, 뒷부분(발레씬)이 쓸데없이 너무 길다는 사람까지 다양하더군요. 달댕이님 마음에도 드셨으면 좋겠네요. 모 사태는요. 여기서 말씀드릴 수는 없고 데*스 게시판에서 ** 사태라고 된 글을 보시면 아실 겁니다. ^^;;; 이름 ::   비밀번호 ::   홈페이지 ::